| 나는 자판을 두들기던 손을 문득 멈추고 모니터 옆에 놓여 있는 술병으로 눈길을 돌렸다. 투명한 노란빛 액체가 반쯤 담긴 유리병. 병에 손 끝을 가져다 대자 병 속에 담긴 액체의 한기가 그대로 내 손으로 전해져 왔다. 곧바로 병 안에 담긴 액체를 내 몸 안으로 흘려 넣자 그 한기가 전류처럼 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식도. 가슴. 그리고 팔과 손 끝까지.
지금 내 몸을 엄습해 오는 이 한기는 나만이 느끼는 느낌. 다른 누구도 이 느낌을 공유할 수는 없다. 다른 사람도 지금 나와 동일한 상황에서 동일한 맥주를 동일한 속도로 마실지도 모르지. 그렇다 하더라도 그의 느낌과 나의 느낌은 다를 수 밖에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와 나는 하나가 아닌 둘이니까.
조금씩 취기가 오르면서 시선이 흐릿해지는 걸 느낀다. 머릿 속이 조금씩 띵해지고, 모니터에 비치는 글자가 조금씩 뿌옇게 변한다.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이 감각, 이 느낌. 나만이 느끼는 고유한 이 감각을 철학자들은 퀄리아라고 표현한다지. 결국 그 딴 명칭은 중요한 게 아니다. 내가 이름을 불러주었기 때문에 그것이 비로소 꽃이 되었다 하더라도, 결국 그 꽃이라 불리운 사물의 본질이 변하는 것은 아니니까. 모든 것은 그대로다. 결국 그 어떠한 것에 이름 혹은 그 밖의 무엇인가를 부여한 사람 안의 그 어떠한 것에 대한 인식이 변화했을 뿐.
문득 다른 곳까지 생각이 뻗친다. 그럼 내 생각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나는 내 귀에조차 들릴 듯 말 듯한 작은 소리로 한숨을 내뱉으며 다시 술병에 손을 뻗었다. 이 세상에 나를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이 한명이라도 있을까. 언제나 그랬 듯이 정해져 있는 대답은 No-
물론 누군가에게 나를 이해시키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런 일 따위, 가능할 리가 없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한명도 없다는 건 숨막힐 정도로 괴로운 일이다. 누구에게도 나는 마음 편히 의지할 수 없으니까. 어떤 사람은 나의 어떤 부분을 이해한다. 그 사람에게 솔직해 질 수 있는 건 그 부분에 관한 것 뿐이다. 또 다른 사람이 있다하더라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나의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하며, 나 역시 그에게 나 자신으로서 솔직해 질 수 없다.
나는 타인에게 솔직할 수 없다. 그것이 현실. 치유할 수 없는 괴로움. 하지만 나는 내가 솔직해 질 수 있는 누군가를 찾고 있다. 마치 과거의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철학의 근본을 갈구했던 것처럼. 나에게 있어 솔직해 질 수 있는 누군가를 찾는다는 것은 나의 생명을 거는 것과도 같은 일이다. 내가 그런 사람을 찾을 수 있다면, 진심으로 나의 목숨조차 내어주어도 아깝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다시 술병에 손을 뻗으며 생각한다. 정말로 그런 사람이 나타난다면 내 목숨조차 아끼지 않고 내어줄 수 있을 것인가. 나는 나 자신에게조차 솔직하지 못하다. 스스로를 속이며, 타인을 속인다. 내가 나를 속이고 타인을 속이는 동안, 타인도 또 하나의 나로서 자신을 속이고 또 다른 타인을 속이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내가 솔직해 질 수 있는 누군가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믿는다. 아니, 믿고 싶다. 어쩌면 내 스스로가 더 이상 내 자신을 속이지 않게 되는 그 순간 나는 내가 간절히 찾던 그 사람을 찾을 수 있게 될지도 모르지. 그 누군가가 내 가까운 곳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며, 나는 마지막 남은 한모금의 노란 액체를 집어 삼켰다. 유난히 씁쓸한 그 액체의 맛은 마치 나 자신과도 같았다.
- 2003년 9월 14일에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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