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이라는 거, 어떻게 생각해?"
은정이 뜬금없이 질문을 던졌다. 밖을 바라보던 시선을 은정에게 돌렸다. 은정은 왼손으로 턱을 괴고 길다란 스푼으로 커피를 휘휘 젓고 있었다. 커피잔 안에 담긴 검은 액체는 스푼의 움직임에 따라 작은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난 커피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약간은 성의 없이 대답했다.
"몰라. 사랑 같은 거, 아직 해 본 적이 없으니까."
은정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별다른 반응 없이 고개를 아주 약간 까닥거렸다. 그리고는 집고 있던 스푼을 커피잔 옆에 내려 놓았다. 스푼과 테이블 위에 깔린 유리가 부딪히면서 탁 소리를 냈다.
"너 예전에 연아 엄청 좋아했었잖아. 그 때 너 나한테 그러지 않았어? 연아를 사랑하는 거 같다구. 사랑이라는 감정이 어떤 건지 알 것 같다구."
나는 심드렁하게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두꺼운 유리 너머로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길거리에 물건을 늘어 놓고 파는 노점상 주인도 있고, 바쁘게 걸음을 재촉하는 회사원도 있다. 쇼윈도에 진열된 옷가지며 보석들을 몽롱한 눈으로 바라보는 젊은 여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새로 생긴 가게를 홍보하기 위해 쉴 새 없이 전단지를 나누어 주는 나이든 여자, 그리고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천천히 사람들을 피해 걷고 있는 노인. 저 사람들에게는 사랑이라는 게 얼마만큼의 무게를 갖고 있을까.
"벌써 한참 된 얘기지. 그 때는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아. 그저 집착이라던가 그런 비슷한 거겠지."
"뭐야, 그게. 그 땐 사랑이었고, 지금은 사랑이 아니라는 거야?"
"몰라. 어쩌면 그 때 정말로 내가 사랑을 했던 건지도 모르고. 이게 사랑이다, 저게 사랑이다, 이런 식으로 확실히 정해져 있는 건 아니니까. 그 때는 그게 정말 사랑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건 사랑이 아닌 것 같아. 내가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렇게 쉽게 바뀌는 게 사랑이라고 생각하진 않아."
"그 말에는 나도 동감이야. 나도 사랑이 그렇게 쉽게 왔다갔다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거든. 그래서 그런가, 요새 자꾸만 이런 생각이 들어."
"어떤?"
다시 은정에게 시선을 돌렸다. 은정은 어느 샌가 허리를 펴고 똑바로 앉아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은정이 진지한 이야기를 할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다들 그런 거 같아. 니가 방금 말했던 것 처럼. 사람을 한참 좋아할 때는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하잖아. 서로에게 사랑한다는 말도 몇번씩, 몇십번씩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이고. 그런데 그 사람과 헤어지고 나면 그게 사랑이 아니었다고 생각하지. 너도 그렇고."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크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그런 식으로 이야기 하는 사람도 적지 않으니까.
"그런데 그 사람과 헤어지지 않았다면? 그럴 수도 있잖아. 만약에 니가 연아랑 헤어지지 않고 계속 좋아하면서 지금까지 사귀어 왔다면, 그래도 그 때 니가 느꼈던 감정이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할까? 아닐거야. 적어도 내 생각은 그래."
"그래. 니 말대로 그렇게 생각하겠지. 그게 사랑이라고."
"그래. 그럼 뭐야? 결국 그 때 니가 느꼈던 감정은 똑같은 거잖아. 그런 감정을 가진 사람이랑 소위 잘 되어서 좋은 결과를 낳았다면 그게 사랑이 되는거고, 지금처럼 부정적인 관계로 끝이 났다면 그게 사랑이 아닌 게 되는 거야?"
"음..."
은정의 말이 맞았다. 아마 내가 지금도 연아와 사귀고 있다면, 그 때 느꼈던 그 감정은 틀림없이 사랑일거라고 굳게 믿고 있겠지.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어. 사랑이라는 게 너무 결과론적인게 아닌가 하고 말야. 잘되면 사랑이고, 잘 안되면 사랑이 아니고. 그치만 그 때 느꼈던 건 분명히 같은 감정이었을 거 아냐."
결과론적이라. 그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은정의 말대로 그 두 감정은 결국 같은 감정이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그 때 내가 연아에게 갖고 있었던 그 감정. 그건 정말 사랑이 아니었나, 하고. 하지만 돌아오는 건 여전히 별 의미없는 대답 뿐이다.
"난 확신할 수가 없어. 그 때 내가 느꼈던 감정이 사랑인지 아닌지 말야. 도대체 뭐가 사랑이고 뭐가 사랑이 아닌건데? 나는 어떤 걸 사랑이라고 부르는 지 모르겠어. 하지만 난, 적어도 사랑이라는 건, 영원히 변치 않는 거라고 생각해. 중간에 변해버린다면 그건 사랑이 아냐. 사랑이 아닌 무언가겠지. 내가 그 때 연아를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건, 사랑이 뭔지 몰랐기 때문일 뿐이야. 그러니까 그게 사랑이라고 착각했던 거지. 나만 그런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다들 마찬가지 아닐까? 사랑이 뭔지 모르니까. 그러니까 사랑이 아닌 걸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은정은 커피잔을 내려다 보며 가만히 내 말을 듣고 있다. 나는 들릴 듯 말 듯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그래. 분명히 니 말대로 사랑이라는 건 결과에 의존하는 거겠지. 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난 사랑은 변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 하지만 내 감정이 바뀔지 바뀌지 않을지, 그건 아무도 모르잖아? 그러니까 마지막까지 결과를 보지 않으면 그게 사랑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없을 뿐 아닐까? 사랑이 결과에 휘둘리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 단지 확인하려면 결과가 필요할 뿐인 거겠지."
은정은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커피잔만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나도 아무 말없이 커피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씁쓸한 액체가 입술을 적신다. 에스프레소는 어느새 차갑게 식어있었다. 은정은 한숨을 푹 쉬면서 고개를 들었다.
"어렵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구나..."
난 차갑게 식어버린 에스프레소를 홀짝홀짝 들이키면서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두워진 거리는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한 커플이 벤치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남자는 웃는 얼굴로 여자의 귀에 다정하게 무언가를 속삭이고 있었다. 사랑한다는 말일까. 저 두 사람은 정말로 서로를 사랑하고 있을까. 언젠가는 헤어져서 남남이 되어 버리지는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는 고개를 저으면서 커플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내가 갖고 있는 감정도, 사랑이 아닐지도 모르겠네, 어쩌면."
"응?"
"아, 아냐. 그냥 혼잣말이야."
은정은 겸연쩍게 웃으며 커피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문득 은정의 위에 연아의 모습이 겹쳐졌다. 연아도 혼자서 중얼거리고서는 겸연쩍은 웃음을 지으며 커피잔을 집어들고는 했었다.
연아를 좋아했냐는 질문에는 자신있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그렇지만 사랑했냐고 묻는다면 어떤 대답도 할 수가 없다. 사랑한다는 게 어떤건지, 좋아한다는 것과 사랑한다는 것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언젠가 그런 걸 알 수 있는 날이 올까.
후. 쓸데없는 상념들을 떨쳐버리며 단숨에 남아있는 커피를 들이마셨다. 씁쓸한 맛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 2003년 3월 23일에 쓴 글
|